A Quiet Pause in Your Daily Ritual. /We test things over months, not afternoons. /2026.10.12
FAQ RSS 검색 뉴스레터 →
Where modern culture meets mindful insight Skin · Wellness · Living · Table · Notes · Abroad
Monthly Glow
⌕
Subscribe
The Ritual·Editor's Pick·Latest
The Routine Notes·6 min read

속옷이 일상복이 되던 순간, 마나스의 답

오래 입을 옷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SoyulEditor · 2026.09.29
구독하기 →

오래 입을 옷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파리 패션위크 무대에 오른 에스터 마나스(Ester Manas)와 발타자르 들르피에르(Balthazar Delepierre)의 2027년 봄여름 컬렉션은 얼핏 화려한 란제리 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옷장 전체를 다시 짜는 작업에 가깝다. 컬렉션명 '허라도 어떻게든'(Somehow I Manage)은 미국 드라마 오피스 속 마이클 스콧이 썼다는 가상의 책 제목에서 따왔는데, 두 디자이너가 함께한 열두 번째 시즌이라는 점에서 제목 자체가 하나의 자기 고백처럼 읽힌다. 이번 무대가 눈에 띄는 이유는 란제리를 감추거나 과시하는 대상으로 다루지 않고, 매일 입는 옷의 기본 재료로 삼았다는 데 있다. 속옷의 소재와 구조가 겉옷의 뼈대가 되고, 파티용으로만 쓰이던 태피터가 재킷과 스커트로 넘어오는 흐름은 단순한 스타일 실험이 아니라 '오래 입을 옷은 결국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라는 질문에 더 가깝다. 패션위크의 화제성과는 별개로, 이 질문은 옷장을 계절마다 통째로 갈아치우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오래 남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대 위 옷이 화려해 보일수록 오히려 매일 입을 옷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끼기 쉬운데, 이번 컬렉션은 그 거리를 의도적으로 좁혀 놓았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이유가 생긴다.

무엇이 달라졌나

이번 시즌의 출발점은 1865년 문을 연 란제리 브랜드 프리마돈나(Primadonna)의 아카이브였다. 오랫동안 큰 사이즈 여성을 위한 란제리를 전문으로 만들어온 이 브랜드의 색과 자재를 두 디자이너가 지금의 옷장으로 옮겨왔다. 오래된 옐로 톤은 베이지로 가라앉았고, 원색에 가까웠던 블루는 바다를 닮은 오션 블루로 옮아갔다. 과거 아카이브 색을 그대로 복원하는 대신 지금 시대에 맞게 톤을 낮춘 셈인데, 이는 복고를 그대로 재현하는 흔한 아카이브 컬렉션과는 다른 접근이다. 이번 시즌 파리 무대 전반에서 반복된 퍼플 역시 곳곳에서 함께 등장했다. 변화는 색에서 그치지 않았다. 원래 프린세스 드레스에나 쓰이던 태피터는 이번엔 테크니컬 재킷과 평상시에 걸칠 수 있는 스커트로 다시 재단됐고, 튤과 레이스는 트렌치코트 밑단 사이로 살짝 비쳐 보이는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화려한 특수 소재를 특별한 날 한 번 입는 옷에 가두지 않고, 매일 걸치는 겉옷 안으로 끌어들인 셈이다. 컬렉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조각은 손으로 직접 짠 스커트로, 프리마돈나 창고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재고에서 나온 리본이 무려 2만 2000개나 하나하나 손으로 붙었다. 새 원단을 찍어내는 대신 이미 창고에 있던 재고를 끝까지 써서 만든 조각이라는 점에서, 이전 시즌들과 가장 크게 달라진 지점은 소재 자체가 아니라 소재를 대하는 태도라고 봐야 한다.

왜 지금인가

란제리를 일상복의 기본값으로 끌어오는 흐름은 이번 시즌 에스터 마나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파리 무대에서 마린 세르(Marine Serre), 생로랑(Saint Laurent), 발망(Balmain)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속옷의 구조와 소재를 겉옷 안으로 들여왔고, 이는 장식적인 섹시함을 강조하던 예전의 란제리 룩과는 결이 다르다. 여러 브랜드가 같은 시즌에 비슷한 방향을 택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속옷을 과시나 노출의 코드로만 쓰던 화법이 이제 소비자에게 크게 새롭지 않다는 신호로 읽을 수 있다. 마나스와 들르피에르가 이번에 특히 강조한 지점은 몸을 바라보는, 부모가 된 이후 달라진 시선이다. 두 디자이너는 부모가 되면서 옷이 몸을 무언가의 상징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관점을 옮겼고, 그 결과가 몸을 과시하거나 가리는 대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옷들로 나타났다. 여기에 더해 이미 오래전 만들어진 아카이브 색상과 창고에 잠들어 있던 리본 재고를 새 컬렉션의 핵심 재료로 다시 꺼내 쓴 선택도 눈여겨볼 만하다. 새로 찍어내는 대신 이미 있던 것을 오래 두고 쓰는 방식은, 옷을 계절마다 새로 사고 버리는 흐름과는 분명히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이번 파리 무대 전반에서 비슷한 소재 재활용과 아카이브 재해석이 반복해서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고, 결국 지금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몸과 소재를 대하는 방식 자체가 한 시즌의 유행을 넘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음에 볼 것

이번 컬렉션의 룩은 브랜드 공식 홈페이지에서 전체를 확인할 수 있고, 같은 주 파리에서 열린 마티에르 페칼(Matières Fécales)의 2027년 봄여름 퍼블릭 쇼케이스 역시 이번 시즌 파리 무대의 결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지점으로 꼽힌다. 관건은 이 흐름이 한 시즌의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옷장에 남을 만한 실용 아이템으로 이어지는가다. 태피터로 만든 재킷과 스커트, 트렌치 아래로 비치는 튤과 레이스가 특별한 자리를 위한 옷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꺼내 입을 수 있는 옷으로 자리를 잡을지, 그리고 창고 재고를 다시 쓰는 방식이 다음 시즌에도 이어질지는 앞으로 지켜볼 부분이다. 특히 손으로 짠 2만 2000개 리본 스커트처럼 시간이 많이 드는 조각이 한정판으로 남을지, 아니면 조금 단순화된 형태로 실제 판매 라인까지 이어질지도 확인해볼 만하다. 열두 번째 시즌을 지나며 두 디자이너가 보여준 방향은 분명하다. 몸을 가리거나 증명하는 옷이 아니라, 매일 걸치고도 질리지 않을 옷을 오래 입는 쪽으로 가겠다는 신호다. 유행을 좇는 옷이 아니라 계절이 몇 번 바뀌어도 옷장 한 자리를 지킬 옷을 만들겠다는 태도가, 이번 컬렉션이 남긴 가장 분명한 답이다.

PuttingFunFunctional DressingSummerEster ManasBalthazar Delepierre
04 Read next 전체 보기 →
Notes

데님을 쿠튀르로 바꾼 포포바, 오래 입는 옷의 조건

Notes

마사코 테라니시, 계절이 바뀌어도 남는 것들

Notes

CGV, 진격의 거인 극장판 3편 순차 개봉 — SCREENX·4DX 동시 상영

← Previous캄퍼재팬이 굳이 받은 B콥 인증, 81점이 말해주는 것 Next →매일 밤 사과 한 알에서 시작된 무게의 미학

바로가기 등록하시면, 더 쉽게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