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탄력적 스타일이 오래 가는 이유
9월 21일 애틀랜타에서 열린 슬레이터(Slayyyter)의 공연은 일찌감치 전석 매진되었고, 저녁 무렵 내린 가랑비에도 관객들은 공연장 블록을 빙 둘러 줄을 섰다. 그런데 이 줄에서 눈길을 끈 것은 공연 자체가 아니라 관객들이 입고 온 옷이었다. 주유소에서 나눠줄 법한 트러커 모자, 거칠게 잘라 고쳐 입은 데님, 라인스톤과 카모 무늬를 함께 두른 장식까지 - 마치 오래된 옷장을 통째로 꺼내 다시 조합한 듯한 차림이었다. 이런 스타일이 단순한 팬 코스튬을 넘어서는 이유는, 이 옷들 상당수가 하루짜리 이벤트를 위해 새로 산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옷을 계절과 취향에 맞춰 다시 손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한 번 입고 버리는 소비가 아니라 계속 다듬어 가는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이 장면은 옷을 오래 입는 습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 몇 시간씩 줄을 서면서도 새 옷 대신 손질해 온 옷을 입고 나온 이들의 태도는, 한 번의 무대를 위해 소비되고 마는 스타일과는 분명히 결이 다르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왜 지금 다시 눈에 띄는지를 들여다보면, 결국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고르고 가꾸는 습관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무엇이 달라졌나
슬레이터가 올해 발표한 앨범 'WOR$T GIRL IN AMERICA'는 일렉트로트래시 장르를 표방하면서, 가사 곳곳에 샤넬과 셀린느, 생로랑 같은 브랜드를 직접 언급한다. 다만 이 브랜드들은 새 제품 그대로가 아니라 낡고 해진 버전으로도 함께 등장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즉 명품을 그대로 걸치는 방식이 아니라, 명품이 상징하는 동경과 손이 닿는 현실의 옷 사이 긴장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런 태도는 이번 애틀랜타 공연장 앞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팬들은 값비싼 새 옷 대신 이미 가진 데님을 잘라 다시 박음질하고, 카모 무늬 원단에 라인스톤을 직접 붙이는 식으로 자신만의 버전을 만들어 왔다. 이는 슬레이터가 올해 초 코첼라 무대에서 선보인 레이스 장식 상의, 뮤직비디오 'CANNIBALISM!'에서 착용한 비즈 장식 쇼걸 의상과 백조 머리 장식으로 이어지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무대 위 의상이 새 옷을 사는 대신 있는 옷을 변형하는 태도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이번 공연장의 팬 패션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같은 제작 방식을 공유하는 재현에 가깝다. 최근 그의 인지도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 그동안 소규모 팬덤 안에서만 알려졌던 이 DIY 방식도 함께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소수의 팬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만 공유하던 리폼 노하우가, 공연장 앞이라는 오프라인 공간에서 한꺼번에 눈에 띄는 규모로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왜 지금인가
이 장면이 눈에 띄는 시점은 우연이 아니다. 슬레이터는 이번 앨범과 투어를 통해 메인스트림 진입을 앞두고 있고, 이번 애틀랜타 공연에서는 하드코어 밴드 턴스타일의 리믹스 곡 'Birds'를 처음으로 라이브 무대에 올렸다. 일렉트로팝과 하드코어를 오가는 협업은 그의 팬층이 한 장르에 머물지 않고 계속 넓어지고 있다는 신호이며, 공연장 앞에 줄 선 팬들의 스타일이 다양해진 것도 같은 흐름 안에 있다. 동시에 이런 현상은 패션 소비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더 큰 맥락과도 이어진다. 시즌마다 새 옷을 사들이는 방식 대신, 가진 옷을 계절에 맞게 고쳐 입고 다음 시즌에도 다시 꺼내 쓰는 방식이 점점 자연스러운 선택지가 되고 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몇 시간씩 줄을 서서 자신이 직접 손본 옷을 선보이는 팬들의 모습은, 유행을 한 번 소비하고 버리는 태도와는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하나의 공연을 위해 그 순간만 소비되는 옷이 아니라, 다음 공연에도 다시 꺼내 입고 조금씩 손봐 가며 유지하는 옷이라는 점에서, 이 스타일은 팬덤 문화 안에서도 꾸준히 이어질 습관에 가깝다. 브랜드 로고 하나로 완성되는 스타일보다, 시간을 들여 계속 다듬어야 완성되는 스타일이 더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이 공연장 앞 풍경이 보여주고 있다.
다음에 볼 것
슬레이터의 투어는 애틀랜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며, 도시마다 팬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옷을 새롭게 고쳐 입고 나타나는지를 지켜볼 만하다. 같은 앨범, 같은 무대 의상이라도 도시와 계절에 따라 팬들의 해석이 달라지는 만큼, 이 DIY 스타일이 하나의 유행으로 굳어질지, 아니면 지역마다 다른 방식으로 계속 변주될지가 다음 관전 포인트다. 턴스타일과의 협업 리믹스가 앞으로 정식 음원으로 발매될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만약 정식 발매로 이어진다면, 전자음악과 하드코어를 넘나드는 이번 시도가 슬레이터의 다음 앨범 방향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 무엇보다 눈여겨볼 것은 이런 팬덤발 스타일이 소비자 개인의 옷장 습관에 어떤 힌트를 주는가이다. 트러커 모자 하나, 오래된 데님 한 벌을 계절마다 다르게 손봐 입는 방식은 특별한 비용이나 기술 없이도 시작할 수 있는 습관이다. 라인스톤을 조금씩 덧붙이거나 해진 부분을 일부러 남겨 두는 정도의 손질만으로도, 사둔 옷을 다음 계절까지 이어서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흐름은 참고할 만하다. 결국 이번 애틀랜타의 풍경이 보여주는 것은 화려한 신상보다, 오래 입어 온 옷을 계속 매만져 가는 태도가 더 눈에 띄는 스타일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다음 도시의 공연장 앞 풍경을 눈여겨봐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 같은 옷이 계절과 장소를 거치며 어떻게 다시 손질되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유행이 아니라 습관으로 남는 스타일의 실제 사례를 계속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