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 대신 태도를 기록한 사진집
런던에서 가장 핫한 언더그라운드 백 브랜드로 꼽히는 Six95의 디자이너 샐리 카이트가 이번엔 가방이 아니라 책을 냈다. 은색 아일릿과 동전으로 가죽을 뚫어 자신만의 시그니처를 만들어 온 이 브리스틀 출신 디자이너가 카메라를 들고 향한 곳은 런던의 쇼룸이 아니라 고향인 잉글랜드 남서부, 웨스트컨트리였다. 서머싯에서 자란 로티 콜린스, 사진작가 윌리엄 E. 라이트와 함께 만든 사진집 《Coin For Scale》은 평생 알고 지낸 지역 주민들의 얼굴과 옷차림을 그대로 담았다. 이 지역은 잉글랜드 농장의 25퍼센트가 몰려 있는 농업 지대로, 그동안 패션과는 가장 거리가 먼 곳으로 취급받아 왔다.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일상 차림을 굳이 책으로 묶어 런던의 독립 편집숍 제이크스에서 선보인 것 자체가, "패션 감각"이라는 말의 기준을 다시 묻는 질문이 된다. 매 시즌 새로 갖춰 입는 옷이 아니라, 한 지역에서 대를 이어 입어 온 옷차림에도 스타일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옷장이 유행을 따라 매달 바뀌는 사이, 이 지역 사람들은 날씨와 노동, 계절의 흐름에 맞춰 같은 옷을 몇 년씩 입어 왔고, 그 반복이야말로 이번 사진집이 굳이 기록해 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지점이다. 화려한 신상보다 손에 익은 낡은 옷 한 벌이 더 그 사람을 잘 설명한다는 감각은, 매 시즌 새 옷장을 채우는 도시의 리듬과는 전혀 다른 시간 감각에서 나온다.
무엇이 달라졌나
원문에 따르면 카이트는 이번 작업에서 제품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우리는 평생 알고 지낸 지역의 인물들과 촬영하고 싶었지만, 여기 정서상 패션 제품을 끼워 넣는 게 맞지 않다고 느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곳에는 독립적인 기질, 대중문화에 대한 저항감이 있다. 사람들은 유행을 의식해서 입기보다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옷을 입는 경우가 많다." 이 발언은 단순한 지역 애정 표현이 아니라, 패션 화보가 늘 전제해 온 공식, 즉 브랜드 제품이 주인공이고 인물은 그것을 입는 배경이라는 순서를 뒤집은 선언이다. 《Coin For Scale》에는 협찬도, 룩북 형태의 착장 설명도 없다. 대신 평소 입던 대로 서 있는 농부, 이웃, 친구들의 모습이 담겼다. 카이트 본인의 브랜드 Six95가 낡은 가죽에 동전과 아일릿을 박아 넣어 "쓰던 물건을 다시 쓸모 있게 만드는" 수선의 미감을 내세워 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유행을 좇아 새로 갖추는 옷이 아니라, 오래 입어 온 옷이 그 사람을 설명하는 방식 자체가 이번 사진집의 주제가 된 셈이다. 옷 한 벌을 계절이 몇 번 바뀌도록 그대로 입는 태도, 그리고 그 옷이 낡을수록 오히려 그 사람다워지는 방식은 도시의 소비 주기와는 정반대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새 컬렉션이 나올 때마다 옷장을 갈아치우는 방식이 아니라, 손에 붙은 한 벌을 계속 고쳐 입으며 관계를 맺는 방식이야말로 이번 사진집이 조용히 제안하는 대안이다.
왜 지금인가
웨스트컨트리는 그동안 대중문화 속에서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 지역이다. 영화 《Hot Fuzz》나 시트콤 《This Country》처럼 이 지역을 다룬 콘텐츠들은 대체로 촌스러움이나 폐쇄성을 웃음의 소재로 삼았다. 브리스틀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Skins》가 거의 20년 전 이 지역의 이미지를 조금 끌어올린 것이 거의 유일한 예외로 꼽힐 정도다. 반면 잉글랜드 북부는 지난 수십 년간 특유의 노동계급 미감과 클럽 문화를 발판 삼아 패션 하위문화의 발신지로 자리 잡아 왔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어느 지역의 일상이 스타일로 조명받고 어느 지역은 그렇지 못한지가 이렇게 갈린 셈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카이트처럼 이미 패션계에서 인정받은 인물이 굳이 고향으로 돌아가 그 지역 특유의, 유행과 무관하게 유지돼 온 옷차림을 기록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는 패션이 늘 새로운 것, 도시의 것만을 좇을 필요가 없다는, 지역의 생활 방식 자체가 이미 하나의 완성된 스타일일 수 있다는 관점의 전환을 보여준다. 농사와 계절을 따라 옷을 고르는 삶의 방식이, 트렌드를 따라 옷장을 갈아치우는 삶의 방식보다 오히려 더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이 책이 뒤늦게 증명해 준 셈이다. 유행의 발신지가 늘 대도시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유행에서 한 걸음 떨어진 지역일수록 오래가는 생활 방식을 더 온전히 지켜 왔다는 점을 이 시점에 다시 짚어볼 이유는 충분하다.
다음에 볼 것
《Coin For Scale》은 지난주 런던의 독립 편집숍 제이크스에서 정식으로 공개됐고, 관심 있는 독자는 판매처를 통해 구매할 수 있다. 아트 디렉션은 에스터 메지보브스키가 맡아 사진집으로서의 완성도도 함께 챙겼다. 앞으로 지켜볼 지점은 이 프로젝트가 일회성 화보집에 그치는지, 아니면 카이트가 자신의 브랜드 Six95와 함께 지역 기반의 작업을 이어가는 하나의 축으로 발전시키는지다. 이미 그의 가방이 낡은 동전과 아일릿으로 오래된 가죽에 새 쓸모를 주는 방식을 취해 온 만큼, 이번 사진집 역시 유행을 소비하는 속도 대신 한 지역이 오래 지켜온 생활의 결을 존중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도시의 트렌드가 몇 주 단위로 바뀌는 사이, 웨스트컨트리 사람들의 옷차림은 몇 세대에 걸쳐 거의 그대로 유지돼 왔다는 점이야말로 이 책이 던지는 진짜 질문이다. 유지할 가치가 있는 스타일은 새로 사는 옷이 아니라, 이미 오래 입어 온 옷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을 통째로 새로 채우기보다, 자신의 생활 환경에 맞게 길들여진 옷 몇 벌을 오래 지키는 쪽이 결국 더 확실한 스타일로 남는다는 사실을, 이 책은 멀리 있는 유행이 아니라 가까운 이웃의 얼굴로 보여주고 있다. 다음 시즌에 또 다른 지역판이 나올지, 카이트가 이 작업을 브랜드의 정규 시리즈로 키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번 사진집이 던진 질문, 즉 오래 입은 옷이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실만큼은 다음 계절에도 그대로 유효할 것이다.



